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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기록

아가동산 김기순 교주 나이 남편 아들 신나라 근황

2023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를 통해 언론과 대중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아가동산 에 대해 알아보자

 

김기순 앞모습

김기순

1940년 11월 29일생

경상남도 출생

 

김기순은 교주가 되기 전엔 평범한 주부였다. 1978년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의 주현교회 라는 사이비종교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주현교회는 이교부라는 사람이 이끄는 교회로 신도들에게 머리를 밀게 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삭발교'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 기이한 별칭에 걸맞게, 주현교회에서 일어난 일들도 참으로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교인들 폭행은 물론, 명색이 교회라는 건물 안에서 예배 중에 신도들과 함께 천국으로 가자면서 옷을 홀라당 벗어던지고 껴안고 춤추는 나체 댄스 사건을 일으켜 사회적 큰 물의를 빚었다. (당시에도 뒤로는 사창가 가서 할만한 사람들은 다 했지만, 학생들이 연애하는 만화는 검열삭제하거나 미니스커드는 단속대상이 되는 등 공적으로 엄숙주의가 일반적이었는데 목사라는 사람이 대놓고 나체로 돌아다니는 건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교부는 당시 "어렸을 적 다니던 교회의 목사를 본받고자 특유의 스님 같은 차림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나체 춤을 춘 것으로 물의를 빚으면서 말 그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거기에 충고하러 온 동료목사를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킨 것이 결정적인 사유가 되어 구속됐다. 그리고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고 1981년 출소 후 주현교회를 해산했다.

 

아가동산의 시작

1982년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대대리, 도리리 일대의 땅 4천 평 남짓을 구입해 '아가농장' 이라는 것을 세워 신도들을 모아 아가동산이라는 종교를 만들었다. 이때 주현교회의 해산으로 갈 곳이 없어진 이교부의 신도들까지 빼내면서 덩치를 불려 나갔다. 이런 설립 과정에서 김기순은 멀쩡히 살아 있는 이교부의 영혼을 자기가 계승했다는 주장까지 하며, 자신을 이교부의 진짜 후계자라 자처했다. 이러한 행각은 이교부의 원한을 사게 됐고, 이교부가 출소한 후에도 과거 서로 돕고 지내던 이교부와의 사이도 원수지간이 된다.

 

김기순은 '갈 곳 없는 신도들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고 떡 장사, 어묵 장사, 음반 장사 등으로 땅을 샀다.' 고 주장하는데 과연 이 정도 장사로 어떻게 4천 평을 샀을지는, 특히 1982년에는 첫 수익사업체 '신나라레코드물류'를 세워 초기에는 트럭으로 다른 음반점에 카세트 등 음반을 팔다가 1984년 서울 종로 3가에 자체 매장을 처음 연 후, 특유의 가격파괴 전략을 세워 광속으로 음반도매업계를 장악했다. 또한 1992년 킹레코드를 설립하고 같은 해엔 하나레코드(대전), 1993년 명반레코드(인천)등을 세우기도 했다.

 

기행과 악행

실제로 교주 김기순은 자신을 '아가야'라고 지칭하며 꽃가마를 타고 나타나거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거나 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각을 보이곤 했다. 아가동산은 얼핏 보면 일반적인 개신교 종파 중 하나 같겠지만 사실상 개신교에서 예수만 빼고 그 자리에 자신을 대입한 전형적인 사이비종교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찬송가에 나오는 예수 혹은 예수의 상징을 '아가'혹은 '아가야'라는 말로 치환해서 김기순 자신을 찬송하게 만들거나 기성 종교에 대한 무차별 비난으로써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종교의 교리는 일단 김기순이 신이고, 3살짜리 아기이기 때문에 김기순은 어떤 말을 해도, 어떤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고 이걸 '아가야 법'이라 부르며 신나라에서는 이 법을 따라야 한다고 상당히 해괴한 주장이었다.

 

아가농장은 전형적인 노동착취형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농장관리, 장부관리, 의료관리, 학생관리, 세무관리 등 관리직을 놓고 철저하게 공동체 생활 및 공동작업으로 운영되어서 신도들은 매일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장에서 CD 및 테이프를 만들며 일하는 식으로 원치 않는 투잡을 뛰었다. 물론 거기서 번 수익이 어디로 갔을지는 모른다. 지금도 신나라네이처팜이라고 아직도 이천시 도리리 일대에 있다. "외부에서 파는 채소에는 독이 들어 있다"라고 신도들을 현혹시켰다. 당연하지만 과로로 죽는 사람도 수없이 있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폭행 및 살인, 암매장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98년 대법원 판결상 폭행과 살해 부분이 무혐의로 밝혀졌다고 하지만 피해자들이 증언도 했던 것으로 봐서는 정말 폭행과 살인이 없었는지는 여전히 진위가 매우 의심스럽다.

 

특히 이 곳에서 신도 3명을 살해한 것이 발각되었는데 1987년 8월 14일 밤 9시에는 7세 아동 최모 군이 교주 김기순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돼지우리에서 남자 신도들이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며 1주일 동안 굶기고 폭행 후 죽게 했다. 이때 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몇 대씩 때리고 나오는 방식을 사용해 가해자들이 실제로 아동에게 자신들이 가하는 폭력의 수위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1988년 1월 2일 정오에 과수원 관리책임자이던 윤모 씨도 교주의 말을 잘 안 듣는다며 살해당했고 11월 21세 여성 강모 씨는 '교주의 아들을 현혹시켜 교리를 어지럽혔다'는 명목으로 창고로 끌려가 부모에게 따귀를 맞은 후 여러 신도들의 각목에 맞아 타살당했고 교단 측은 '가출'로 처리했다. 특히 사망자 윤 씨의 아들이 이천경찰서에 진정서를 냈으나 아내가 "남편은 음독 자살했다"라고 주장해서 수사가 안 됐고, 병원 의사들도 사체검안 당시 최 군의 사인을 '선천성 심장질환', 윤 씨는 앞서 말했듯 '음독자살'등으로 처리됐다. 이렇듯 경찰의 수사 비협조와 부실한 사체검안, 유족들의 비협조 등이 수년간 그 사건을 은폐했던 것이다. 또한 목격자들도 폭행 광경을 봤지만 실제 살해 과정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교인들에게는 1년에 딱 4번의 휴가를 줬는데 신정, 광복절, 크리스마스, 그리고 교주 생일이었다고 한다. 교주 생일에 쉬는 이유는 교주 김기순을 우상으로 하는 연극을 상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연히 주말과 추석, 설날 연휴에도 일했다. 그리고 텔레비전, 신문, 외부 출입, 가족 면회 등 바깥 소식을 접하는 건 아예 금지되었다.

 

가족도 김기순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이유로 다 흩어 놓았는데 아버지는 아저씨라고 부르고 어머니는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남인 것처럼 대하게 한 것도 모자라서 호부호형까지 금지했다고 한다. 심지어 부부끼리 동침도 금지했고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신도들이 데리고 간 아이들도 대부분이 중졸정도의 학력에 병역까지 고의로 면탈하도록 종용했다고 하는데 특히 병역을 고의 면탈한 경우 형법상으로는 병역기피로 간주하기 때문에 처벌 대상이 된다. 또 김기순은 기상천국을 세운답시고 신도들의 재산 50억 원 정도를 강제로 빼앗기도 했고 수사 당시 김기순의 은신처에 있는 금고에 만원권 지폐로 현금 7억 원과 1996년 당시 환율로 1,600만 상당의 달러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1995년 8월에 아가동산 이탈 주민들이 교단 측의 탈세와 사기 등 온갖 비리에 대해 경찰에 진정서를 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20일만에 내사 종결처분 내버렸다. 이에 이탈 주민들은 1996년 7월 15일 경기도청에 같은 내용의 진정서서를 제출하자 이천경찰서가 재수사에 나섰다. 12월 1일 수원지방검찰청 여주지청은 이천경찰서로부터 아가동산 관련 수사자료를 넘겨받고서 검-경 합동수사에 돌입해 7일에는 김기순과 관련자 6명에 대해 일부 주민 살해 및 사기 등의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김기순만 영장이 발부됐다.

 

동월 10일에 관리책임자 김씨 등 핵심신도 명을 구속시켜 공개수사로 돌입했다. 그 사이 김기순은 영장이 발부된 후 남편과 함께 시골을 전전하다 동월 16일에 대외업무 담당 정문교 등 3명과 함께 검찰로 자진 출두했으나 관련 혐의에 대해서는 부인했고 결국 구속됐다. 19일에는 실종자 강 씨의 유해발굴에 착수했지만 찾지 못했고 27일에는 김기순 외 10명이 살인 및 사기혐의로 기소됐다. 1997년 4월 28일 김기순에게는 사형을 구형했고 나머지 간부들에게는 중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그 사이 노동법-안기부법 총파업 사태와 한보 사태, 김현철 스캔들, 황장엽 탈북 사건 등 숱한 사회적 이슈들이 잇따라 터지며 아가동산은 점차 잊혔고 그해 1월 3일 증거보전 청구심과 21일 검찰 조서에서 당시 신도 사체 암매장 혐의자였던 굴삭기 기사 윤 씨가 진술을 번복한 사실이 밝혀져 검찰의 무리수 의혹이 퍼져나갔다. 5살의 피해자 최모 군에 대해서도 최 군의 친모 역시 현장에서 진술을 번복해 "아이는 살해당하지 않고 선천성 심장병으로 죽었다"며 교주를 감싸는 바람에 피해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

 

결국 5월 20일 주범 김기순은 수원지법 여주지원에서 조세 포탈, 횡령 등의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4년과 벌금 56억원을 선고받았고 신도 김 씨 외 5명의 살해 혐의는 무죄, 신나라유통 대표이사 강활모에겐 징역 2년 6개월 및 벌금 60억 원 등을 각각 선고했다. 이들 중 김기순은 10월 10일에 보증금 1억 원을 내는 조건하에 보석으로 석방됐다. 1심 선고 당시 재판부는 "아가동산이 순수한 협업마을에서 시작되어 김기순을 지도자로 부각할 때 일부 변질은 있었으나, 종교의식과 포교 활동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검찰의 주장대로 '사이비종교'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는 식으로 증거재판주의에 입각해 발표했다. 이후 1998년 3월 3일 서울고법 항소심, 6월 23일 대법원 상고심에서도 똑같은 판결이 내려졌다.

 

2001년 7월 4일 검찰은 굴삭기 기사 윤씨와 일부 신도들이 강 씨가 암매장됐다고 주장한 유리온실 주변 부지 15평에서 발굴작업을 다시 했지만 유골은 또 못 찾았고 2002년 4월 2일에 김기순에게 위증교사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또다시 강 씨의 유골을 발굴하려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동월 29일 김기순은 공소시효만료로 수배가 해제되어 사실상 수사가 종결됐다. 여하튼 김기순이 신도들의 노력을 훔쳐 세운 아가동산은 김기순이 구속되고 난 후 그 세가 약해지기 시작해 신도가 줄어 사실상 와해상태고, 2000년 8월에 완전히 출소한 김기순은 교주로써의 권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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